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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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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가쿠에이는 1918년 니가타현에서 태어나,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의 최대 파벌인 다나카 파벌을 이끌었다. 그는 '컴퓨터를 단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강력한 추진력으로 사회 기반 시설 정비, 특히 일본 열도 개조론을 통해 고속도로와 신칸센 건설을 추진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지만, 록히드 사건으로 뇌물 수수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고, 금권 정치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비판받았다. 다나카는 총리 퇴임 후에도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1993년 사망했다. 그의 정치 스타일은 오늘날까지 일본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의 공과 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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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쿠에이 다나카 19720707
공식 초상, 1972년
일본어 표기田中 角栄
일본어 로마자 표기Tanaka Kakuei
출생일1918년 5월 4일
출생지가리와군, 니가타현, 일본 제국
사망일1993년 12월 16일
사망지도쿄도, 일본
배우자하나 사카모토
자녀마사노리 다나카 (하나 사카모토와의 사이에서, 4세 사망)
마키코 다나카 (하나 사카모토와의 사이에서)
교 다나카 (쓰지 와코와의 사이에서)
히토시 다나카 (쓰지 와코와의 사이에서)
아쓰코 사토 (아키코 사토와의 사이에서)
서명TanakaK kao.png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1955–1993)
기타 소속 정당민주당 (1947)
동지 클럽 (1947–1948)
민주자유당 (1948–1950)
자유당 (1950–1955)
군사 경력
복무 기간1939–1941
계급상등병
참전 전투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서명TanakaK kao.png
일본어 표기
신자체田中 角栄
구자체田中 角榮
가나たなか かくえい
로마자Tanaka Kakuei
정치 경력
직책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72년 7월 7일 ~ 1974년 12월 9일
국왕쇼와 천황
부총리미키 다케오
이전 총리사토 에이사쿠
다음 총리미키 다케오
직책 1자유민주당 총재
부총재 1시이나 에쓰사부로
1 공석 이름 1간사장
1 이름 데이터 1하시모토 도미사부로
니카이도 스스무
임기 시작 11972년 7월 5일
임기 종료 11974년 12월 4일
이전 총재 1사토 에이사쿠
다음 총재 1미키 다케오
직책 2통상산업대신
총리 2사토 에이사쿠
임기 시작 21971년 7월 5일
임기 종료 21972년 7월 7일
이전 장관 2미야자와 기이치
다음 장관 2나카소네 야스히로
직책 3대장대신
총리 3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임기 시작 31962년 7월 18일
임기 종료 31965년 6월 3일
이전 장관 3미즈타 미키오
다음 장관 3후쿠다 다케오
직책 4우정통신대신
총리 4기시 노부스케
임기 시작 41957년 7월 10일
임기 종료 41958년 6월 12일
이전 장관 4히라이 타로
다음 장관 4테라오 유타카
직책 5중의원 의원
임기 시작 51947년 4월 25일
임기 종료 51990년 2월 18일
선거구 5니가타 3구
학력
최종 학력니타 진조 고등 소학교 졸업
중앙공학교 야간부 토목과 졸업
겐스학관 방교
세이소쿠 영어학교 방교
긴조 상업학교 상업과 4년제 (상사 실무 "기업 재무") 수료
기타
이전 직책다나카 토건 산업 사장
에치고 교통 대표이사 사장/회장
중앙공학교 교장
칭호/훈장육군 상등병
니시야마초 명예정민
1급 건축사
친척 (정치인)다나카 가쿠지 (부)
다나카 나오키 (사위)
다나카 유이치로 (손자)
야마시나 카오루 (조카)
배우자다나카 하나
자녀장남: 다나카 마사노리 (요절)
장녀: 다나카 마키코
차남: 다나카 쿄
삼남: 다나카 유
역대 내각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1차 개조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2차 개조 내각
제11·13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사토 에이사쿠 총재
제9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이케다 하야토 총재
취임일 61972년 7월 5일
퇴임일 61974년 12월 9일
취임일 71965년 6월 - 1966년 12월
퇴임일 71971년 6월
취임일 91961년
퇴임일 91962년
선거구 5구 니가타 3구
당선 횟수 516회
취임일 51947년 4월 25일
퇴임일 51990년 1월 24일

2. 생애

다나카 가쿠에이는 1918년 5월 4일, 니가타현 가리와군 후타다 마을(현 가시와자키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일본해 연안의 낙후된 지역이었으며,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랐다.[1] 두 살 때 디프테리아를 앓고 말더듬 증세가 있었으나 극복했으며, 고등소학교 졸업 후 1934년 도쿄로 상경했다.

2. 1. 정치 입문 전 (1918년 ~ 1945년)

연도내용
1918년 5월 4일니가타현 가리와군 후타다 촌(현 가시와자키시)에서 출생.
1933년후타다진조고등소학교 졸업.
1934년 3월도쿄로 상경하여 지요다구의 주오 공학교 토목과 야간부에 입학, 더부살이하며 학업을 이어감.
1936년 3월주오 공학교 졸업 후 건축 기사로 활동 시작.[33]
1937년공영건축사무소 설립.
1939년 4월군에 소집되어 만주국 후친에서 병역 시작 (기병 제24연대).
1941년 2월폐렴과 흉막염으로 일본으로 후송됨.
1941년 10월병을 치료하고 제대.
1941년 11월도쿄 이이다바시에 다나카 건축사무소 개설.
1942년 3월사카모토 하나와 결혼.
1943년 12월다나카 토건공업 설립.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산업 부문 공사 등을 수주하며 성장.
1944년 1월 14일장녀 다나카 마키코 출생 (장남 마사노리는 1942년 출생, 1947년 사망).
1945년 8월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이화학연구소 공장 이전 작업 중이던 일제강점기 조선의 대전에서 귀국.



다나카 가쿠에이는 1918년 5월 4일, 니가타현 가리와군 후타다 마을(현 가시와자키시)에서 농부 다나카 가쿠지와 후메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이 일찍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자랐으며, 누나 두 명과 여동생 네 명이 있었다. 그의 고향 니가타현은 일본해에 접한 소위 '우라 닛폰'(裏日本, 일본의 뒷면) 지역으로, 태평양 연안의 '오모테 닛폰'(表日本, 일본의 앞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으며, 겨울철 폭설로 생활이 어려운 '눈의 나라'에 속했다.

다나카의 집안은 본래 농가였으나, 할아버지 스테키치는 존경받는 궁궐 목수였고 아버지 가쿠지는 소와 말 거래상이었다. 다나카가 태어날 무렵에는 비교적 유복했지만, 아버지가 홀스타인종 소 수입과 잉어 양식 사업에 실패하고 도박과 음주 문제까지 겹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어머니는 가족 부양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고, 다나카는 할머니 손에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1][31]

두 살 때 디프테리아를 앓은 후유증으로 말더듬 증세가 있었으나, 어릴 적 나니와부시(浪曲)를 부르며 스스로 교정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소학교 시절 내내 반장을 맡았고, 1933년 니타 보통고등소학교[32](현: 카시와자키시립 니타소학교) 졸업식에서는 답사를 읽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다나카는 훗날 자신의 최종 학력을 "고등소학교 졸업"이라고 언급하며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적이 있다. 다나카는 최종 학력에 대해 "중앙공학교" 졸업(1936년 졸업[33])이라고 공표하는 경우가 많았다[35]. 후에 중앙공학교의 5대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34]. 그러나 현재의 중앙공학교는 전문학교로서 도쿄도로부터 인가를 받았지만[35], 전문학교를 포함하는 "전문학교"라는 학교 제도는 1976년에 창설되었기 때문에[36], 그가 재학 당시의 중앙공학교는 학교 제도상의 학교가 아니었다.

소학교 졸업 후 잠시 토목 공사 현장과 현 토목 파견소에서 일했으나, 1934년 3월, 농촌 공업화를 주장하며 니가타현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던 이화학연구소(리켄)의 오코치 마사토시 백작 밑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며 16세의 나이로 도쿄로 상경했다[37]. 그러나 도쿄에 도착해 보니 일자리가 없었고, 건설 회사 견습생으로 일하며 야간에는 주오 공학교 토목과에 다녔다[37]. 이후 보험업계 잡지사, 수입 전문 무역상 등에서 잠시 일했다[37].

이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순조로워지면서 학비 지원이 가능해지자[37], 한때 일본 해군병학교 입학을 목표로 여러 학교에 다녔으나[38],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수입이 더 많은 실업계로 진로를 바꿨다[37]. 1936년 주오 공학교 야간부 토목과를 졸업하고[33] 건축사무소에 취직했다.

1937년 봄, 근무하던 사무소의 소장이 군에 징집되자 독립하여 '공영건축사무소'를 설립했다. 이에 앞서 히비야의 빌딩 엘리베이터에서 오코치 마사토시 백작과 우연히 만난 것을 계기로 친분을 쌓았고, 사무소는 리켄 콘체른으로부터 많은 일을 수주하게 되었다.[2] 이 무렵, 긴죠 상업학교(1936년 상업 4년 수료)[39]에도 재적하며 상사 실무를 배웠다.

1938년 징병검사에서 갑종 합격 판정을 받고 1939년 4월 일본 제국 육군 기병 제24연대에 입대하여 만주국 후친에서 복무했다. 군 복무 중에도 와세다 대학의 건축 강의록을 구해 공부했으며[40], 특유의 성실함과 능력으로 상관의 인정을 받아 1940년 3월 상등병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크룹성 폐렴과 흉막염에 걸려 1941년 2월 일본으로 후송되었고, 치료 후 그해 10월 제대했다.

제대 후인 1941년 11월, 도쿄 이이다바시에 '다나카 건축사무소'를 다시 열었다. 1942년 3월, 사무실 건물의 주인이자 작고한 토목건축업자의 딸인 사카모토 하나와 결혼하며 그의 사업 기반도 물려받았다. 하나는 다나카보다 7살 연상이었고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42년 장남 마사노리(1947년 9월, 4세로 사망)와 1944년 1월 장녀 다나카 마키코가 각각 태어났다.

1943년 12월, 다나카는 기존 사업을 통합하여 '다나카 토건공업'을 설립했다. 오코치 마사토시와의 관계를 통해 이화학연구소(리켄) 콘체른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군수 공장 건설 등 정부 계약을 다수 수주했고, 회사는 연간 시공 실적 전국 50위 안에 들 정도로 급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다나카는 이화학연구소의 피스톤 링 공장을 일제강점기 조선의 대전으로 이전하는 공사를 맡아 한반도로 건너갔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전황이 급변하자, 그는 일본의 항복 선언 전에 현지 자산 목록을 작성하여 "신생 조선에 기증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인 직원에게 넘겼다. 패전 후 8월 하순에 일본으로 귀국했다.[41] 다행히 그의 주요 건물들은 도쿄 대공습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대전 공장 이전 계약금으로 받은 1500만 상당의 일본 전쟁 채권을 서울의 은행에서 현금화하는 데 성공하여 사업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2. 2. 정치 입문과 총리 취임 (1946년 ~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1951년)


1945년 11월, 다나카 가쿠에이는 다나카 건설(田中土建工業)의 고문이었던 베테랑 정치인 오아사 다다오(大麻唯男)를 만났다. 당시 일본진보당을 결성 중이던 오아사는 다나카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다나카는 이를 수락했다. 오아사의 권유로 다나카는 1946년 4월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진보당 공천으로 고향인 니가타 2구에서 출마했다. 선거 운동 중 "미쿠니토게(三国峠)를 무너뜨리면 니가타에 눈이 내리지 않게 되고, 그 흙으로 일본해를 메우면 사도까지 육지로 연결된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지역 유력자들과 리켄(理研) 동료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지지 기반 분열 등으로 인해 후보 37명 중 11위(정수는 8)로 낙선했다.[3]

1947년 4월, 일본국 헌법 시행 후 첫 총선거인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다나카는 더욱 철저히 준비하여 니가타현 제3선거구(정수 5)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다시 출마했다. 농촌 유권자를 공략하며 외딴 마을까지 부지런히 방문한 결과, 12명 중 3위로 당선되어 중의원에 입성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가타야마 내각이 제출한 석탄 광산 국가 관리 법안에 반대 표를 던져 다른 14명의 의원과 함께 탈당 권고를 받았다.

의회에서 그는 전 총리 시데하라 기주로와 가까워져 그의 동지 클럽에 합류했다. 1948년 동지 클럽이 민주자유당으로 당적을 변경하자, 다나카는 당수 요시다 시게루의 눈에 띄어 그해 10월 제2차 요시다 내각에서 역대 최연소 법무정무차관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1948년 12월, 규슈의 탄광업체로부터 100만의 뇌물을 받은 혐의(탄광 국가 관리 의혹 사건)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요시다와 민주자유당은 다나카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당직 해임 및 자금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다나카는 1949년 총선에 옥중 출마를 강행했고, 보석으로 풀려난 뒤 선거에서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내각관방장관 사토 에이사쿠와 협상하여 법무차관직 사임 조건으로 민주자유당 당적을 유지했다.

1950년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했다. 같은 해 건축사법 법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고, 1급 건축사 등록 제1호가 되었다. 한편, 부실 상태였던 나가오카 철도를 인수하여 1951년에 운행을 재개시키는 등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1951년 6월, 탄광 사건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해 선거에서는 철도 회사 직원들의 도움과 억만장자 사업가 오사노 겐지의 지원에 힘입어 압승을 거두었다. 오사노 겐지는 이후 다나카의 가장 충실한 후원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53년 4월에는 모교인 주오 공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72년까지 재직했다.

1955년 11월,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하여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다나카도 이에 참여했다. 1957년 7월, 제1차 기시 노부스케 개조 내각에서 39세의 나이로 우정대신에 임명되어 전후 첫 30대 각료가 되었다. 우정대신 재임 중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 면허를 승인하고, 지역 유지들이 우체국장을 맡는 위탁 우편 제도를 지지하며 전국 우체국장들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이는 훗날 그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1]

1961년 7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거쳐, 1962년 7월 제2차 이케다 하야토 개조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대장대신 시절, 산파치 폭설 당시 처음으로 재해구조법을 적용했으며, 일본은 역사상 가장 높은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1][47] 그는 제1차 사토 에이사쿠 내각까지 대장대신직을 유지했다.

1965년 6월, 사토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간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검은 안개 사건으로 불리는 자민당 의원들의 부정부패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자, 다나카 본인이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66년 12월 간사장직에서 물러나 후쿠다 다케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자민당 도시정책조사회장(1968년 5월 '도시정책 대강' 발표)을 맡았다가 1968년 11월 다시 간사장에 복귀했다. 이 시기부터 후쿠다 다케오와의 라이벌 관계는 "각복전쟁(角福戦争)"이라 불리며 격화되었다.

1969년 4월, 장녀 다나카 마키코가 스즈키 나오토 전 중의원 의원의 삼남 다나카 나오키와 결혼했다. 나오키는 데릴사위로 다나카 가문에 입적했다.[48] 같은 해 8월에는 대학의 운영에 관한 임시 조치법 성립을 주도하여 대학 분쟁 수습에 기여했다.[49][50]

1971년 7월, 제3차 사토 개조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통산대신으로서 일미 섬유 교섭에서 미국의 수출 규제 요구에 맞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오키나와 반환 협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2년 5월 9일, 사토 에이사쿠 파벌(주산회) 내에서 81명의 의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파벌(다나카파)을 결성했다.[51] 6월에는 자신의 정책 구상을 담은 저서 《일본열도 개조론》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그가 총리가 된 후 베스트셀러가 되어 91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1972년 7월 5일,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사토 에이사쿠가 지지하던 후쿠다 다케오를 누르고 신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다음 날인 7월 6일,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이 출범하면서 다나카는 다이쇼 시대 출신 첫 내각총리대신이자 니가타현 출신 첫 총리가 되었다. 출범 초기 내각 지지율은 70%에 육박할 정도로 높았다. 방대한 지식과 추진력으로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총리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경력 때문에 "현 태합", "서민 재상"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29] 그는 도로법 전면 개정을 비롯해 33건의 의원 입법을 성사시키는 등 사회 기반 시설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건설성, 운수성, 통산성, 우정성 등 관련 부처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소위 족의원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2. 3. 총리 시절 (1972년 7월 7일 ~ 1974년 12월 9일)

1972년 7월 7일 사토 에이사쿠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했다. 사토는 후쿠다 다케오를 후계자로 원했으나, 다나카는 당시 높은 인지도와 나카소네 야스히로, 오히라 마사요시 파벌의 지지를 바탕으로 197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를 282표 대 190표로 누르고 승리했다. 그는 당시 일본 역사상 신임 총리로서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총리직에 올랐다. 방대한 지식과 실행력을 겸비하여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29] 다이쇼 시대 출생자로는 첫 총리였다.

총리 취임 당시 공식 사진


1973년 7월, 워싱턴 D.C.에서 리처드 닉슨과 함께한 다나카


취임 직후, 다나카는 자신의 저서 《일본 열도 개조론》에 담긴 구상을 바탕으로 일본 전역에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신칸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야심찬 인프라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신칸센 노선이 단 하나뿐이었던 상황에서, 인구 30만~40만 명 규모의 중소 도시로 경제 기능을 분산시키고 이 도시들을 도쿄, 오사카 등 중심 도시와 고속철도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이었다.[2] 이러한 사회 기반 시설 정비 구상은 도로법 전면 개정, 도로·항만·공항 정비 특별회계법 제정 등 33건의 의원 입법으로 이어졌으며, 전후 일본 사회 기반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히 건설성, 운수성, 통상산업성, 우정성 등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가에 의한 관료 통제의 상징이자 족의원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1972년 8월 미국 대사의 본국 보고서에는 그의 끈기와 결단력이 자수성가한 경력에서 비롯되며, 대담함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태도는 종전 직후 혼란기에 성공한 배경을 반영한다고 평가했다.[30]

총리 재임 중 가장 큰 외교적 성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였다. 1972년 9월 29일, 다나카는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 등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총리,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하고 일중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국교를 수립했다.[2][52] 이로써 기존의 일화 평화조약은 종료되었고, 같은 날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일본과의 단교를 선언했다.[57] 회담 과정에서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문제도 논의되었으나, 저우언라이는 "이번에는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4] 방중 당시 저우언라이로부터 "言必信行必果(언필신행필과: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라는 글귀가 적힌 색지를 받고 기뻐했으나, 이 글귀가 논어에서 소인배를 평하는 구절의 일부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의 교양 부족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었다.[53][54][55][56]

다나카 정부는 복지 정책 확대에도 힘썼다. 국민연금 수급액을 2배로 증액하고,[6] 노인 의료비 무료화, 1972년 아동 수당 지급, 1973년 연금의 물가 연동제 등을 도입했다.[7] 또한 1973년에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건강 피해자들에게 보상금과 의료비를 지급하고 관련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내용의 환경오염 건강피해 보상법을 제정했다.[8]

1972년 12월 22일, 제33회 총선거에서 자민당 의석이 감소하자 거당일치체제를 도모하며 제2차 다나카 내각을 발족시켰다.[58] 1973년 5월에는 소선거구제 도입(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을 제안했으나 야당과 여론의 강한 반발("각만더" 비판)로 철회했다.

1973년 8월 8일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동서 냉전 하에서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며, 사실상 한국 측의 주권 침해 행위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일방적인 정치적 해결 방식을 수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59]

경제적으로는 1973년 들어 지가와 물가의 급격한 상승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0월 16일 제4차 중동전쟁 발발로 인한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었다.[1] 이에 다나카는 중동 정책을 기존의 이스라엘 지지에서 아랍 국가 지지로 전환하고,[61] 11월 내각 개조를 통해 정적인 후쿠다 다케오대장성 장관으로 임명하여 수요 억제와 에너지 절약을 골자로 하는 긴축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 전원 개발 촉진 세법 등 전원 삼법을 제정하여 가시와자키 가리와 원자력발전소 건설 보조금 등에 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 실정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1973년 말부터 1974년 초에 걸쳐 내각 지지율은 20% 아래로 떨어졌다.[62]

외교적으로는 1973년1974년에 걸쳐 미국, 프랑스, 영국, 서독, 이탈리아, 소련,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여러 국가를 방문했다.[5] 특히 1973년 10월 소련 방문에서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회담하고 일소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북방영토 문제 해결에는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74년 1월 동남아시아 순방 중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는 대규모 반일 시위(말라리 사건)에 직면하기도 했다.[63]

1974년 7월 제10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여야 의석수 차이가 크게 줄어들자(백중국회), 미키 다케오후쿠다 다케오 등 당내 경쟁자들이 내각에서 이탈했다.[64] 결정적으로 1974년 10월, 월간지 《문예춘추》 11월호에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과 고다마 다카시야의 〈외로운 에쓰잔카이의 여왕〉이라는 두 기사가 게재되면서 다나카의 불투명한 자금 문제, 이른바 '다나카 금맥 문제'가 폭로되었다.[9][46][65][66][67] 기사에서는 다나카 측근들이 공공사업 발표 전 토지를 매입해 이익을 챙긴 정황 등이 상세히 묘사되었다.[9] 비록 기사 내용 중 명백한 불법 행위가 적시된 것은 아니었으나,[2] 이 기사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외국 특파원 협회 기자회견과 국회 등에서 금맥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추궁이 이어졌다.[67][68] 특히 국회 조사 과정에서 핵심 증인으로 지목된 에쓰잔카이 회계 담당 사토 아키와의 개인적 관계가 드러날 것을 우려한 다나카는[1] 결국 1974년 11월 26일 사퇴 의사를 표명했고,[1] 12월 9일 내각은 총사퇴했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은 886일이었다. 후임으로는 시이나 에쓰사부로의 중재 하에 미키 다케오가 총리로 선출되었다.[69]

2. 4. 총리 퇴임 후 (1974년 12월 10일 ~ 1993년 12월 16일)

1974년 10월, 잡지 문예춘추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정치 자금과 인맥을 둘러싼 의혹, 이른바 '다나카 금맥 문제'를 상세히 다룬 기사를 게재했다.[9] 이 기사는 공공사업 발표 직전 관련 토지를 서류상 회사를 통해 매입하여 이익을 챙기는 방식 등 그의 자금 형성 과정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으나, 기사에서 지적된 내용 중 명백한 불법 행위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자민당 내 반대파들은 국회에서 조사를 요구했다. 결국 다나카는 1974년 11월 26일 총리직 사퇴를 발표했으며, 이는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발표했다.[1] 총리 퇴임 후 다나카는 미키 다케오의 "클린 정치"를 내세운 총리 취임을 지지하며 평의원으로 돌아갔다.

'''록히드 사건과 정치적 영향력'''

1976년 2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산하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에서 록히드사가 항공기 판매를 위해 각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록히드 부회장은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 재임 시절, 종합상사 마루베니를 통해 약 18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5억 엔)의 뇌물을 받고 1972년 전일본공수(ANA)가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 항공기 21대를 구매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증언했다.[10] 당시 미키 다케오 총리는 미일 안보 관계 악화를 우려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련 정보 공개를 미국 측에 요청하는 등 사건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2]

결국 1976년 7월 27일, 다나카는 5억 엔의 뇌물 수수 혐의와 외국환 및 외국무역 관리법 위반 혐의로 비서였던 에노모토 도시오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169][10] 이는 일본 의회민주주의 역사상 전직 총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첫 번째 사례였다.[169] 체포 직후 다나카는 자민당을 탈당했으며, 8월에 2억(당시 미화 69만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도쿄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11] 이 사건은 미국 의회 증언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부 다나카 지지자들은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다나카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제거하려 한 시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2]

체포와 탈당에도 불구하고 다나카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파벌인 목요 클럽(木曜クラブ)은 체포 당시 약 70~80명에서 1981년에는 150명 이상으로 늘어나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13]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막후에서 총리 선출을 좌우하는 '킹메이커' 또는 '어둠의 쇼군'으로 불렸다. 1976년 총선거(일명 '록히드 선거')에서는 자신을 수사한 미키 다케오에 대한 반감으로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고,[14] 1978년에는 오히라 마사요시, 1980년 오히라 총리의 급서 후에는 스즈키 젠코, 1982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총리로 내세우며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14] 특히 나카소네 내각은 다나카의 전폭적인 지지로 출범하여 '다나카소네 내각(田中曽根内閣일본어)'이라는 비판적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재판과 파벌 분열'''

1983년 10월 12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록히드 사건 1심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징역 4년과 추징금 5억 엔의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10] 다나카는 "불퇴전의 결의(不退転の決意)"를 표명하며 즉각 항소했고, 의원직 사퇴도 거부했다. 이 판결은 일본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나카소네 총리는 다나카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중의원을 해산(다나카 판결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15] 이 선거에서 다나카는 자신의 지역구인 니가타 3구에서 22만 표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며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자민당 전체적으로는 의석수가 크게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다.[16] 선거 후 나카소네 총리는 "소위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다나카와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였으나,[16] 1984년 개각에서는 다케시타 노보루를 포함한 다나카파 의원 6명을 입각시키는 등 여전히 다나카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16]

1984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나카파 회장이었던 니카이도 스스무 부총재를 옹립하려는 움직임(니카이도 옹립 구상)이 있었으나, 다나카는 나카소네의 재선을 지지했다. 그러나 파벌 내에서는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1985년 2월 7일,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한 중진·소장파 의원 40명이 다나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벌 내 공부 모임인 '소세이카이(創政会|소세이카이일본어)'를 결성했다.[17][71] 이는 다나카 파벌 분열의 서막이었다.

'''뇌경색과 정치 활동 중단'''

소세이카이 결성 불과 20일 뒤인 1985년 2월 27일, 다나카는 뇌졸중(뇌경색)으로 쓰러져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 입원했다.[17][72] 이로 인해 언어장애와 오른쪽 반신 마비 등 심각한 후유증이 남아 사실상 정치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그의 건강 상태는 가족과 주치의 외에는 극비에 부쳐졌으며, 같은 해 6월에는 다나카 사무소가 폐쇄되었고, 9월에 시작된 록히드 사건 항소심에도 출석하지 못했다.

1986년 총선거에서 다나카는 와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지지 조직인 에쓰잔카이의 활동에 힘입어 16번째 당선되었으나, 임기 4년 동안 단 한 번도 국회에 출석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공백 상태가 길어지면서 파벌 내 권력 투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 노보루는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을 모아 새로운 파벌인 게이세이카이(経世会)를 창립했다.[73] 다나카파(목요 클럽) 소속 의원 143명 중 113명이 게이세이카이에 참여하면서 다나카파는 사실상 와해되었다.[10] 니카이도 스스무 등 일부 의원들은 목요 클럽에 남았으나, 주도권은 완전히 다케시타에게 넘어갔다. 같은 달 29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록히드 사건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지지하며 다나카의 항소를 기각했고, 다나카 측은 즉시 최고재판소상고했다.[10] 10월, 다케시타가 다나카의 자택을 방문했으나 딸 다나카 마키코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훗날 황민당 사건의 한 단면으로 드러났다.[73] 11월, 다케시타 내각이 발족하며 다케시타 시대가 열렸다.

'''정계 은퇴와 사망'''

1989년 10월, 사위이자 비서 역할을 하던 다나카 나오키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다음 총선거에 불출마할 것임을 공식 발표했다. 1990년 1월 24일, 중의원이 해산됨에 따라 다나카는 43년간의 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그의 강력한 후원 조직이었던 에쓰잔카이도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1992년 8월, 다나카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초청으로 1972년 일중 국교 정상화 이후 20년 만에 중국을 방문했으며, 딸 다나카 마키코가 동행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공식 활동 중 하나였다.

1993년 7월 제40회 총선거에서는 장녀 마키코가 아버지의 지역구였던 니가타 3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다나카 자신도 병든 몸을 이끌고 니가타로 내려가 딸의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38년간의 장기 집권을 마감하고 야당으로 전락했으며,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非)자민 연립 정권이 들어섰다.

1993년 12월 16일 오후 2시 4분, 다나카 가쿠에이는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서 가래가 목에 걸려 발생한 폐렴으로 인해 향년 75세로 사망했다.[26] 그의 사망으로 상고심이 진행 중이던 록히드 사건은 공소 기각 결정으로 종결되었다. 형사 피고인 신분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총리 경험자에게 관례적으로 수여되던 사후 서위·서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74] 장례는 자민당과 다나카 가문의 합동장으로 치러졌다.[74] 묘소는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니시야마정에 위치한 다나카 자택 내에 있다.

2. 5. 사후

다나카 가쿠에이의 록히드 사건 항소심이 법원에 계류 중이던 시기, 그의 건강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다. 결국 1989년 10월, 71세의 나이로 사위인 다나카 나오키를 통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그의 42년간의 정치 경력은 막을 내렸다. 당시 그의 파벌은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가 이끌고 있었으며, 다나카 은퇴 시점에도 자민당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21]

1993년, 다나카 파벌 소속 의원 상당수가 자민당을 탈당하여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끄는 8개 정당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1] 다나카는 이후 당뇨병 진단을 받았고, 1993년 12월 16일 오후 2시 4분, 게이오 대학 병원에서 폐렴으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도쿄 북부에 위치한 그의 자택은 지지자와 기자들로 둘러싸였다.[1]

1995년 2월, 최고재판소는 에노모토 도시오의 록히드 사건 상고심 판결에서 다나카가 록히드 사로부터 5억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며 그의 뇌물죄 유죄를 확정했다. 이는 현직 총리가 연루된 대형 부패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다나카 사후에도 그의 파벌(목요 클럽, 이후 헤이세이 연구회)은 자유민주당 내에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변화를 겪었다. 1992년 다케시타 노보루리크루트 사건으로 실각한 후,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가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을 창당하면서 파벌은 분열되었다. 오부치 게이조가 남은 파벌을 계승하여 하시모토 류타로의 총리 취임을 지원했고, 본인도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오부치 사망 후에는 하시모토가 파벌을 이끌었으나, 자금 스캔들로 인해 2005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파벌은 쓰시마 유지를 거쳐 2009년 총선 전 누카가 후쿠시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994년 단행된 선거 제도 개혁과 새로운 정치 자금 규제, 그리고 일본의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지속된 경기 침체로 인해 파벌의 자금 동원력과 정치적 영향력은 1980년대 다나카-다케시타 시대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다.

다나카는 신인 후보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지원하여 자신의 파벌을 확장하는 전략을 사용했는데, 이는 후대의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5년 선거에서 소위 '고이즈미 키즈'를 대거 영입했고, 오자와 이치로는 2009년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유사한 전략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들 '키즈'들은 과거 다나카 파벌만큼의 강한 충성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1998년 4월, 다나카의 고향인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니시야마 정에 《다나카 가쿠에이 기념관》이 개관했다.[75] 2000년에는 아사히 신문이 실시한 '지난 1000년 일본의 정치 지도자' 독자 인기 투표에서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4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같은 신문의 『"쇼와"하면 떠오르는 인물』 전국 여론조사에서는 21%의 응답률로 쇼와 천황(31%)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76] 2017년 기준으로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한 쇼와 향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25]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에 위치한 다나카 가쿠에이 기념관


다나카 마키코는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니가타현 제3구에서 1993년 총선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1] 그녀는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외무상을 역임했으며, 아버지의 중일 관계 개선 노력을 의식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일본과 미국이 취한 일부 대중국 강경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22] 2002년 자민당을 탈당한 후, 2012년 민주당 정권 말기에 문부과학상으로 입각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6일 (아버지 다나카 가쿠에이의 기일) 치러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이 무렵, 아버지의 강력한 후원 조직이었던 에쓰잔카이는 소수의 고령 회원만 남긴 채 사실상 해체되었다.[23] 2016년 7월 10일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사위 다나카 나오키마저 낙선하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첫 당선 이후 약 70년간 이어져 온 다나카 가문의 국회 의석은 완전히 사라졌다.

2007년 7월 16일 발생한 니가타현 주에쓰 해역 지진으로 니가타현에 있던 다나카 가문의 묘비가 파손되는 일이 있었다. 2024년 1월에는 다나카의 도쿄 자택이었던 '메지로 고텐'(目白御殿)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딸 마키코는 불단에 켜둔 향이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다나카의 제자였던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전 간사장은 "그 저택은 다나카 권력의 정점을 상징했다. 다시는 그런 곳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의 상징이 사라졌다"고 논평했다.[24]

3. 공적과 과실에 대한 평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다나카 파벌(목요 클럽)을 이끌었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능숙한 관료 조종술과 실행력을 겸비하여, 당인 정치가이면서도 관료 정치가의 특징을 함께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방대한 지식과 끈기로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으며,[29]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총리 자리에 오른 경력으로 "현 태합", "서민 재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요 공적으로는 일중 국교 정상화가 꼽히지만, 김대중 납치 사건 처리나 제1차 석유 위기 대응은 비판받는다. 일본 열도 개조론은 사회적 반향과 함께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으며, 의원 시절 다수의 의원 입법을 통해 사회 기반 시설 정비에 기여했으나 특정 부처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으로 족 의원의 시초라는 평가도 받는다.

다나카 금맥 문제와 '''록히드 사건'''으로 인한 총리직 사임 및 자민당 탈당은 그의 정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이후에도 파벌을 통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킹메이커 역할을 했으나, "(메지로의) 암군(闇君)"이라는 비판적인 별명을 얻었다.

다나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엇갈린다.


  • 긍정적 평가:
  • 다케시타 노보루: "정치 감각 면에서 천재", 법률 지식과 관료 장악 능력 탁월.
  • 고토다 마사하루: "책임을 져 주는 리더", "명쾌하고 간결하며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뛰어난 지식인", "명확한 국가 비전과 통찰력 소유".
  • 사토 아키코 (비서): "긍지 높고 성실한 사람", "유연한 발상과 개혁 의지를 가진 정치가", 서민을 위한 정책 실행 강조.
  • 하야사카 시게조 (비서): "항상 대국관에 서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정치가", "독창적 발상, 평이하고 명쾌한 언변".[144]
  • 코나가 케이이치 (통산성 관료): 박력과 카리스마, 겸손함("아래에서 위를 보는 시선"), 엄청난 노력과 공부하는 자세, 타고난 통솔력.
  • 이시하라 신타로: "장사의 천재", "선견지명이 풍부한 정치가".[145]
  • 니카이 도시히로: "국민부터 정치가까지 마음을 쓰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항상 진심을 다했다."
  • 호리타 치카라: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매우 일본적인 정치가. 선악 양면에서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인물."
  • 아이자와 히데유키: "(대장성 관료 시절) 굉장한 분. 서류를 꼼꼼히 보고 매우 공부벌레였다."
  • 노구치 유키오: "능력의 높이와 배짱에 관료들이 반했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 이와타 아타루: "'세치(世知)'에 능하며, 계산은 '보통 사람'을 소중히 하려는 따뜻함에서 비롯."
  • 사가와 키요시: "모든 면에서 본보기가 되는 남자. 끊임없는 노력, 남다른 친절함, 시대를 내다본 예리한 감성. 남자도 반하는 남자."[146]

  • 비판적 평가:
  • 야마모토 시치헤이: 본질적으로 "지역 정치가"이며, 니가타의 경험을 일본 전체에 적용하려 했을 뿐 시대 변화에 대한 이해 부족.[147]
  •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리처드 V. 앨런: "교활한 자".
  • 사타카 신: 과거에는 비판적이었으나, 현재는 "더러운 비둘기"로서 상대적으로 평가.


이처럼 다나카 가쿠에이는 뛰어난 능력과 추진력으로 큰 업적을 남겼지만, 금권 정치와 권력 남용이라는 그림자를 동시에 가진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3. 1. 사회 기반 시설 정비

중의원 의원 시절, 다나카는 100개가 넘는 의원 입법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특히 그가 주도하여 전면 개정한 도로법이나 도로·항만·공항 등의 정비를 위해 제정된 특별회계법 등은 일본의 사회 기반 시설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행정 공무원을 능가하는 방대한 지식과 실행력으로 ‘컴퓨터를 단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특히 건설성이나 운수성 등 관련 부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자신이 장관을 역임했던 통상산업성이나 우정성 등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치가에 의한 행정 공무원 통제의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1972년 총리 취임 후,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신의 저서 일본 열도 개조론에 기반하여 일본 전역에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야심 찬 인프라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단 하나의 신칸센 노선만 존재했던 상황에서, 그는 30만~40만 명 규모의 인구를 가진 중소 도시로 경제 기능을 이전하고 고속철도를 통해 이 도시들을 도쿄, 오사카 등 중심 도시와 연결하는 구상을 제시했다.[2] 이 계획에 따라 전국적으로 대규모 교통 인프라 정비가 추진되었다. 화물 수송량이 15년 후 4.2배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이에 대비해 신칸센을 건설하고 남는 재래선을 화물 수송에 활용한다는 계획이었다.[116] 1964년에는 일본철도건설공단을 설립하여 각지의 철도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후 철도화물수송은 예측과 달리 감소세를 보였고, 국철은 1966년부터 적자로 전환되어 해체될 때까지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1980년에는 연간 약 1조의 적자를 기록하게 되어 국철 재건법에 따라 일부 노선 건설이 동결되거나 폐선되었다.[117] 최종적으로 일본국유철도청산사업단에 의해 처리되었으나, 약 24조의 막대한 잔여 부채는 고스란히 국민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고속도로는 일본도로공단을 통해 건설되었으나, "제2의 국철"이라는 비판 속에 성역 없는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민영화되었다. 또한 우체국 자금을 활용하여 멜파르크, 간포노야도 등 리조트 시설을 건설했으나, 이 역시 우정민영화에 따라 매각되었다.

다나카는 자신의 선거구인 니가타현의 사회 기반 시설 정비에도 특히 열성적이었다. ‘설국(雪國)과 도시의 격차 해소’,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내세우며 간에쓰 자동차도조에쓰 신칸센과 같은 대규모 사업부터 나가오카시오지야시 등 도시 지역의 제설 장치 설치, 산간 지역 마을의 고립을 막기 위한 터널 정비(오지야시의 시오야 터널은 당시 60세대 마을에 10억의 건설비를 투입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등 생활 밀착형 사업, 그리고 가시와자키카리와 원자력 발전소 유치 등 다양한 공공사업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지역 개발은 후원회 조직인 ‘에쓰잔카이(越山会)’를 통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이는 건설업자의 공공사업 수주와 선거 시 다나카에 대한 투표라는 교환 거래의 장으로 기능했다. 에쓰잔카이는 지역 주민의 생활 향상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자민당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이익 유도와 금권 정치의 상징으로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공공사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불균형적인 지역 산업 구조를 고착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가오카시의 시나노가와 하천 부지 매입·이용 문제 등에서는 자신이나 친족이 임원을 맡은 ‘가족 기업’에 대한 이익 제공 의혹이 제기되어 금권 문제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히드 사건 이후에도 에쓰잔카이는 다나카에게 압도적인 득표를 안겨주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우라사역 동쪽 출구에는 1985년 제막된 다나카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글씨는 니카이도 스스무가 썼다. 2005년에는 딸 마키코의 요청으로 동상 위에 지붕이 설치되었다. 반면, 모교인 주오 고등학교(中央工学校)가 교내에 동상을 세우려 했을 때는 “학교에 정치를 가져오는 것은 좋지 않다”며 거절한 일화도 있다.

한편, 일본 경제와 다나카의 인기는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인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1] 이는 야심 차게 추진되던 사회 기반 시설 정비 계획을 포함한 국정 운영 전반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3. 2. 월산회와 자금 조달

1954년 10월의 다나카 가쿠에이


다나카 가쿠에이의 정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자 지지 기반은 그의 고향인 니가타현에 기반을 둔 정치 후원회 조직인 越山会|에쓰잔카이일본어였다. 에쓰잔카이는 일본 정계에서 가장 강력한 후원회 중 하나로 꼽혔고, 전성기에는 회원 수가 9만 5천여 명에서 10만 명에 달했다. 이 조직은 니가타현 농촌 지역 주민들의 민원을 받아 다나카에게 전달하고, 다나카는 정부 예산을 동원한 공공사업(이른바 포크 배럴) 유치로 화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 대가로 지역 주민들은 에쓰잔카이에 회비를 내며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이 자금은 다시 다나카를 포함한 지역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 자금으로 쓰였다.

에쓰잔카이는 단순한 후원 조직을 넘어, 건설업자의 공공사업 수주 알선과 선거 시 표 동원을 맞바꾸는 이익 교환의 창구 역할을 하며 지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나카는 1950년대부터 에쓰잔카이 회원들을 버스로 도쿄 자택에 초청해 개별적으로 면담하고 국회황궁 견학을 시켜주는 등 공을 들여 조직을 관리했다. 이는 에쓰잔카이를 매우 긴밀하고 강력한 정치 조직으로 만들었으나, 점차 야쿠자와 같은 위압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킨다는 비판도 받았다.

에쓰잔카이의 지원을 바탕으로 추진된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다다미 강 수력 발전 사업, 신 시미즈 터널, 그리고 지역 개발의 상징이자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 조에쓰 신칸센 고속 철도 노선 건설 등이 있다. 다나카는 "낙후된 지역과 도시의 격차 해소",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간에쓰 자동차도나 조에쓰 신칸센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뿐만 아니라, 나가오카시나 오지치시 등 지역 내 제설 장치 설치, 산간 마을의 동계 고립 방지를 위한 터널 건설(시오야 터널(塩谷トンネル)의 경우, 소규모 마을에 거액의 건설비가 투입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과 같은 생활 밀착형 사업, 가시와자키 카리와 원자력 발전소 유치 등 다양한 공공사업을 지역구에 끌어왔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유권자의 민원을 직접 접수하고 자신의 실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낙후된 지역 주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민당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노골적인 이익 유도 행태와 금권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공공사업 추진 과정에서 나가오카시의 시나노가와 하천 부지 매입 문제처럼 자신이나 친족이 운영하는 '가족 기업'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다나카의 '돈 문제'가 지속적으로 세간의 도마 위에 오르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지역 경제가 공공사업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서 왜곡된 산업 구조를 남겼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다나카의 비서였던 사토 아키코는 에쓰잔카이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아 '에쓰잔카이의 금고 담당', '에쓰잔카이의 여왕' 등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의 존재는 다나카의 막대한 자금 동원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나, 다나카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해고되었다.

로크히드 사건으로 다나카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쓰잔카이는 '철의 단결'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조직력을 유지하며 선거 때마다 다나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를 바탕으로 다나카는 실각 이후에도 오랫동안 일본 중앙 정계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나카는 1990년 정계를 은퇴하면서 에쓰잔카이를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이후 1993년 총선거에서는 구 에쓰잔카이 회원들의 상당수가 그의 딸인 다나카 마키코를 지지하면서, 그의 정치적 자산 일부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3. 3. 정치



1945년 11월, 전쟁 중부터 다나카 토켄 고교(田中土建工業)의 고문이었던 진보당 의원 오아사 유오의 요청으로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것을 계기로 정계와 인연을 맺었다. 오아사의 권유에 따라 1946년 4월 제2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진보당 공천으로 고향인 니가타 2구에서 출마했다. 당시 다나카는 "미쿠니토게를 무너뜨리면 니가타에 눈이 내리지 않게 되고, 그 흙으로 일본해를 메우면 사도까지 육지로 연결된다"는 연설을 했으나, 후보 37명 중 11위(정수 8)로 낙선했다.

1947년 4월, 일본국헌법 시행 후 첫 총선거인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새로 설정된 니가타현 제3구(정수 5)에 진보당의 후신인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3위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가타야마 내각이 제출한 임시석탄광업관리법안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졌고, 이로 인해 다른 14명의 의원과 함께 탈당 권고를 받았다. 이후 민주자유당을 거쳐 1950년 3월 자유당에 합류했다.

정계 활동 외에도 지역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다. 1950년 10월, 에치고 교통 나가오카 선을 운영하는 나가오카 철도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토 에이사쿠 등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의 도움과 일본개발은행의 융자를 통해 1951년 12월 노선 전철화를 성공시켰다. 이를 계기로 나가오카 철도 연선 지역에서의 지지 기반을 넓혔고, 1952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1위로 당선되었다. 1953년에는 자신의 강력한 후원 조직인 '에쓰잔카이(越山会)'를 결성했다. 에쓰잔카이는 니가타 농촌 지역 주민들의 청원을 받아 정부 예산을 이용한 포크 배럴 사업으로 해결해주고, 그 대가로 재정적 지원과 선거 지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전성기에는 회원 수가 10만 명에 달했으며, 다다미 강 수력 발전 사업, 신 시미즈 터널, 조에쓰 신칸센 건설 등이 에쓰잔카이가 지원한 대표적인 사업이다. 1950년대에는 에쓰잔카이 회원들을 버스로 도쿄 자택으로 초청해 개별 면담 후 국회와 황궁 견학을 시켜주는 등 조직 관리에 힘썼다. 이러한 방식은 에쓰잔카이를 긴밀한 정치 조직으로 만들었으나, 점차 야쿠자와 유사한 이미지를 강화시키기도 했다.

1954년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의 부간사장이 되어 "요시다 13인중"의 한 명으로 꼽혔다. 1955년 11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창당되자 이에 합류했다. 1956년 하토야마 이치로의 후계자를 정하는 총재 선거에서는 사토 에이사쿠 파벌에 속해 사토의 형인 기시 노부스케를 지지했다. 기시 내각에서는 1957년 7월 첫 각료직인 우정성 장관에 임명되어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 면허를 발급하고, 지역 우체국장들과 자민당 간의 유대를 강화했다.[1] 1959년 6월에는 자민당 부간사장에 임명되었고, 사토 파벌의 핵심 간부인 "5봉행"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기시 사임 후 이케다 하야토를 지지하여 이케다 내각에서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거쳐 재무성 장관을 역임했다. 재무상 재임 기간은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기와 겹친다.[1] 1964년 이케다의 뒤를 이어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가 되자, 1965년 6월 자유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검은 안개 사건으로 불리는 자민당 의원들의 부정부패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자, 다나카 본인이 연루되지는 않았음에도 1966년 12월 후쿠다 다케오에게 간사장직을 넘겨주고 자민당 도시정책조사회장으로 물러났다.

이후 다나카와 후쿠다는 사토의 유력한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이 경쟁은 언론에서 "각복전쟁"이라 불렸다. 1967년 총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다나카는 1968년 11월 다시 간사장에 임명되었고, 1971년에는 통상산업성 장관이 되었다. 통산상 시절 일미 섬유 교섭에서 미국의 수출 규제 요구에 맞서 강경한 태도를 보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오키나와 반환 협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6월, 지역 격차 해소와 국토 균형 발전을 내세운 『일본열도 개조론』을 출간했다. 이 책은 91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같은 해 7월 다나카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 다케오를 꺾고 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다. 고등소학교 졸업 학력으로 총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경력 때문에 "현 태합(今太閤)", "서민 재상" 등으로 불리며 취임 초기 지지율은 70%에 육박했다. 다이쇼 시대 출생으로는 첫 총리였다. 재임 중 일중 국교 정상화, 일중 기자 교환 협정 체결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김대중 납치 사건, 제1차 석유 위기 등 어려운 문제에도 직면했다. 그가 주창한 일본열도 개조론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일본 전역의 개발 붐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지가 폭등을 유발하여 지지율 급락의 원인이 되었다. 물가 폭등을 비판했던 정적 후쿠다 다케오를 재무대신으로 기용하여 경제 안정화를 꾀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병행하는 선거제도 개혁안을 추진했으나, 야당과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철회했다. 이 개혁안은 특정 정당에 유리한 선거구 획정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게리맨더링에 빗대어 "가쿠맨더링"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같은 해, 부동산 및 정치 자금 관련 의혹인 다나카 금맥 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1976년 미국의 항공기 제조사 록히드사가 ANA에 항공기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수수한 혐의(이른바 '''록히드 사건''')로 체포되어 자민당을 탈당했다. 그럼에도 당내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목요 클럽)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며 막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론은 그를 "어둠의 쇼군(闇將軍)" 또는 "(메지로의) 암군(闇君)"이라고 불렀다. 특히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로 취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킹메이커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막후 정치 스타일은 총리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정치 권력 구조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나카 자신이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총리직에 복귀하려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파벌 내에서 다른 인물이 총재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점도 파벌 내 불만을 키웠다. 결국 이러한 불만은 1985년 다케시타 노보루가 파벌 내 의원들을 이끌고 독립(소세이카이 결성)하면서 다나카파가 분열되고 붕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나카파는 "숫자가 힘이다"라는 다나카의 신념 아래 팽창을 거듭하여 전성기에는 소속 국회의원이 140여 명에 달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다나카 군단", "다나카 친위대" 등으로 불렀다. 파벌에는 니카이도 스스무,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등 당 중진들과 함께, 훗날 다케시타 파벌 칠봉행으로 불리게 되는 하타 쓰토무,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오자와 이치로, 가지야마 시즈로, 오쿠다 게이와, 와타나베 고조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다나카가 자민당 간사장 시절이나 당내 실력자로 부상하던 시기에 정계에 입문하여 다나카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다나카는 오자와 이치로를 아꼈다고 전해진다. 파벌 운영에는 고토다 마사하루의 지휘 아래 움직인 비서 집단의 역할도 컸으며, 이들은 1978년 자민당 총재 예비선거에서 오히라 마사요시를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명 비서로는 금고지기 역할을 한 사토 아키코, 대변인 역할을 한 하야사카 시게조 등이 있다.

다나카는 전형적인 당인파(党人派)였지만, 관료 출신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자신의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을 지낸 고토다 마사하루를 중용했다. 또한 중의원 의원으로서 도로법 전면 개정 등 33건의 의원 입법을 성사시켜 전후 일본의 사회 기반 시설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건설성, 운수성, 통상산업성, 우정성 등 관련 부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가에 의한 관료 통제의 상징이자 족의원(族議員)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야당과의 관계에도 능숙하여, 민사당과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비준 국회 이후 가스가 잇코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121] 공명당과는 언론 출판 방해 사건 처리 과정에서 공명당 측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중도 성향의 공명당을 포섭하여 혁신 세력(사회당, 공산당)을 견제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되며, 이후 자공 연립 정권의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122]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방대한 지식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일중 국교 정상화 등 외교적 성과를 내고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다. 서민적인 이미지와 카리스마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며, 부하들을 잘 챙기고 책임을 지는 리더십을 가졌다는 평가도 받는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다나카를 "정치 감각 면에서 천재"라고 평했으며, 고토다 마사하루는 "명확한 국가 비전과 통찰력을 가진 뛰어난 지식인"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야사카 시게조는 다나카가 "항상 대국관에 서서 문제의 구체적인 해결책을 준비하고 방침을 제시하는 정치가"라고 평했다.[144]

반면, 일본열도 개조론이 초래한 인플레이션과 지가 폭등, 록히드 사건으로 대표되는 금권 정치, 탈당 후에도 파벌을 통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암장군" 정치 등은 강한 비판의 대상이다. 그의 정치가 지역 이익 우선주의에 치우쳤으며, 파벌 정치를 심화시켜 정치 불신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다나카를 본질적으로 "지역 정치가"이며, 일본 전체를 자신의 지역구처럼 다루려 했다고 비판했다.[147]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리처드 V. 앨런은 그를 "교활한 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나카 파벌은 그의 사후에도 자민당 내에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1992년 리크루트 사건 이후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이 탈당하여 신생당을 창당하면서 분열되었다. 남은 파벌(헤이세이 연구회)은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을 총리로 배출했으나, 선거 제도 개혁과 정치 자금 규제 강화, 일본의 거품 경제 붕괴 등의 영향으로 과거와 같은 영향력은 점차 상실했다.

다나카의 장녀 다나카 마키코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선되었고[1],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에서 일본과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22] 그녀는 2012년 총선에서 낙선했으며[23], 아버지의 후원 조직이었던 에쓰잔카이도 사실상 해체되었다.

2024년 1월, 도쿄에 있던 다나카의 자택("메지로 고텐")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시바 시게루는 이를 두고 "다나카 권력의 정점을 상징했던 저택"이자 "한 시대의 상징이 사라졌다"고 평했다.[24] 2017년 기준으로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한 향수가 존재한다는 분석도 있다.[25]

3. 4. 외교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가장 두드러진 외교 성과는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이다.[2] 이는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미키 다케오가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지지 조건으로 내건 중일 국교 정상화 방침 등이 배경이 되었다. 다나카의 정치적 스승인 사토 에이사쿠는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를 중시했기에 다나카 본인이 친중파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총리 취임 후 중일 국교 수립을 빠르게 추진했다. 1972년 9월, 다나카는 중국을 방문하여 총리 저우언라이,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과 회담하고 9월 29일 일중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국교를 정상화했다.[52] 이 과정에서 일화 평화조약의 종료를 확인했으며, 같은 날 중화민국은 일본과의 단교를 선언했다.[57] 이는 다나카의 가장 큰 공적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중화민국과의 단교 결정은 여전히 비판받고 있다. 회담 중 센카쿠 열도 문제도 논의되었으나, 저우언라이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4] 1978년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중 국교 정상화의 주역으로 다나카의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118]

1973년 10월 16일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다나카 내각은 기존의 이스라엘 지지에서 아랍 측 지지로 중동 정책을 전환하고, 중동 외 지역에서 에너지를 직접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61] 일부 지지자들은 이 정책 전환이 미국의 석유 자본에 타격을 주어 록히드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1973년 8월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대한민국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일본의 주권 침해 문제와 한국 측의 일방적인 정치적 해결을 용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9] 일각에서는 당시 일본 정부가 적절히 대응했다면 이후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나카는 재임 중 활발한 정상 외교를 펼쳤다. 1973년과 1974년에 걸쳐 미국, 프랑스, 영국, 서독, 이탈리아, 소련,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1973년 미국 방문 시에는 TV 프로그램 ''미트 더 프레스''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유럽 방문은 1962년 이후, 소련 방문은 1956년 이후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이었다.[5] 1973년 10월 소련 방문에서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회담하여 일소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의 미해결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일본 정부는 이를 근거로 북방 영토 문제가 미해결 상태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하지만, 공동 문서에 영토 문제 자체가 명기되지는 않았다.[60]

1974년 1월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했을 때는 자카르타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말라리 사건)가 발생하여 양국 관계에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63] 한편, 브라질에는 세라도 농업 개발 협력 사업을 제안하여 식량 자원 확보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는 석유 파동 등으로 자원 확보가 중요 외교 과제로 떠오른 시점에 이루어진 제안으로, 이후 JICA를 통해 장기간 추진되어 브라질의 곡물 생산 증대에 기여했다.

1974년 11월에는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는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방일이었으며, 공동 성명에서는 "일미 친선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가 새겨졌다"고 평가되었다.[120]

북한에 대해서는, 1973년 김일성이 제안한 조국 통일 5대 강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입장을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이 밝히기도 했다.[119]

아카사카 궁전에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회담(1974년)

참조

[1] 뉴스 Kakuei Tanaka, 75, Ex-Premier and Political Force in Japan, Dies https://www.nytimes.[...] 1993-12-17
[2] 뉴스 今も熱く語られる政治家「田中角栄」の功罪 http://www.nikkei.co[...] 2014-01-13
[3] 웹사이트 新潟2区 https://go2senkyo.co[...] ichini
[4] 뉴스 Getting Senkaku History Right https://thediplomat.[...] 2013-11-26
[5] 웹사이트 Diplomatic Efforts Made by Japan: Prime Minister Tanaka's Visits to Various Countries http://www.mofa.go.j[...] Ministry of Foreign Affairs (Japan)
[6] 서적 Culture and Welfare State https://books.google[...] Edward Elgar 2008-01-01
[7] 서적 Japan's Emergence as a Global Power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8] 간행물 The Japan of Today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Educational Information, Inc. 198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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